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친하게 지내던 후배 신부님이 부친상을 당했다. 한 달 전 암을 판정받고 갑자기 쓰러져 거의 의식이 없이 지내시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그저 더 이상의 고통없이 편안하게 가신 걸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더 사실 수 있는 연세였기에 막상 돌아가셨을 때는 자신도 슬퍼했다고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근에 문상갈 일이 부쩍 많아졌다. 코로나 유행 이후로 집에서만 지내셨던 어른들이 기초 체력이 약해지다보니 면역력이 떨어졌고 조그마한 증세에도 쉽게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차에다 검정색 양복과 제의를 준비하고 다닌다.
마침 문상간 시간에 후배 신부들이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미사 강론 중에 귀에 쏙 들어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 인생이 허무한 건 삶의 시간이 짧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해서 너무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기 직전에야 마지막에야 돌아보게 되는 자신의 삶을 어찌 회한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걸 조금이라도 일찍 깨달았다면 더 의미있게 살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 가운데는 죽어가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차분히 마무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마저도 의미가 없겠다 싶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본인이 아닌 삼자들의 입장이니 뭐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문상 가는 일은 언제나 마음이 착잡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태도를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만, 정말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에 스스로 행복했노라 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설령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의 삶도 그 긴 시간 동안 어려움과 괴로움이 어찌 없다 할 수 있겠는가?
과거를 돌아보며 정리하는 건 떠나야 하는 이의 몫이기도 하지만 남아있는 이의 몫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매번 문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여전히 나의 삶을 걱정하면서 돌아온다. 그 걱정이 차분하게 지나온 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다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인생이 허무한 건 짧아서가 아니라 너무 늦게 깨닫기 때문이라고 하던 후배 사제의 강론은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경쾌한 죽비와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