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성인

성 바오로

성인명바오로 (Paul)
축일6월 29일
성인구분성인
신분사도, 순교자

   베냐민 지파에 속한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도 성 바오로(Paulus)는 당대의 유명한 유대인 랍비인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회심하기 전까지는 사울(Saul)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천막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던 그는 엄격한 바리사이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렬한 박해자였다. 그는 첫 순교자 스테파누스(Stephanus, 12월 26일) 부제의 순교 현장에도 있었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그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34-36년 사이). 이 환시는 그의 극적인 개종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사도 9,1-22).

   그 후 그는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지낸 후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그는 즉각 유다인들의 맹렬한 반발에 직면했고 그에 대한 위협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레타(Aretas) 왕의 총독이 바오로를 잡으려고 성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밤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성벽을 타고 도시를 빠져나갔고, 39년경에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났으나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박해자였던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계속해서 그를 없애려고 하자 타르수스(Tarsus)로 가서 몇 년을 지내다가 43년경 그를 찾아온 성 바르나바를 따라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교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사도 11,25-26). 이것이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전교의 시초가 되었다. 45년경부터 성 바오로는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하게 되었다. 45년부터 49년까지 그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파견을 받고 성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Cyprus), 페르게,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리카오니아 지방의 이코니온과 리스트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이 여행에서 이름을 바오로로 개명했다. 첫 선교 여행을 마치고 49년경에 예루살렘에 온 그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와 성 야고보(Jacobus) 및 다른 사도들을 설득하여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보편성 확립에 기여한 한편, 그의 이방인 선교를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도록 하는 등 교회의 체제 면에서도 한층 더 진보된 단계를 맞이하였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직후 성 바오로와 성 바르나바는 제2차 선교 여행을 계획했다(49-52년). 제1차 선교 여행 중에 세운 교회 공동체를 재차 방문하고자 했는데, 요한 마르코(Joannes Marcus)를 동반하려는 성 바르나바와 의견 차이가 생겨 서로 갈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성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났고, 성 바오로는 성 실라스(Silas, 7월 13일)와 함께 시리아와 킬리키아의 여러 곳을 두루 다녔다(사도 15장). 성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를 가로질러 가서 최초로 유럽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필리피(Philippi), 테살로니카(Thessalonica), 베레아(Berea)에 교회를 세웠으나, 아테네(Athenae)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을 비판하는 ‘아레오파고스’에서의 설교로 다소 효과를 내었을 뿐 신통한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그 후 안티오키아 교회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제3차 선교 여행을 계획했으나(53-58년), 2년 동안은 코린토스(Corinthos)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고, 에페수스(Ephesus)에서는 데메트리오스라는 은장이와의 사건으로 유명했다. 5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성 야고보를 만나 보았고, 이레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 유다인들에게 곤욕을 치르다가 출동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사도 21,27-36). 이때 그는 자기의 개종 과정과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설명하고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심문을 받은 그는 황제에게 상소하여 60-61년 사이에 몰타(Malta) 연안을 따라 로마(Roma)까지 가서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며 비교적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로마의 클레멘스(Clemens)에 따르면 그 후 그는 에페수스,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지를 재차 방문했고(63-67년),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서 사도 베드로와 같은 날에 처형되었다고 한다(에우세비우스의 견해).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그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사도 성 바오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로 꼽힌다. 로마서(코린토스에서 57-58년), 코린토 1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코린토 2서(필립비에서 57년), 갈라티아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콜로새서, 필리피서, 에페소서, 필레몬서(로마에서 61-63년), 테살로니카1 · 2서(코린토스에서 51-52년) 및 사목서간인 티모테오서와 티토서를 써서 보냈다. 히브리서는 아마도 다른 저자인 듯하다. 성 바오로의 공식 축일은 성 베드로와 함께 6월 29일이고, 1월 25일은 그의 회심(개종)을 기념하는 축일로 지낸다.♧

출처 : 천주교 서울대교구 굿뉴스 성인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