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당수에 빠질 때 심청의 심정은?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꿈을 꾸곤했다. 그럴 때마다 꿈에서 헤매기도 하지만 깨어난 후에도 한동안 슬픈 느낌이 남아 있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상실감과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해서, 실패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 주는 슬픔은 오랫동안 남아 있게되고, 그로인한 피해도 때에 따라서는 항구적이다. 그리고 가장 큰 상실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 주는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고전 <심청전>에도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심청은 아버지를 위해 두려움을 딛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심청은 용왕의 도움으로 왕비가 되고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기 전에 그토록 슬퍼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의 두려움, 그것이 심청이 가졌던 슬픔과 공포의 원인이었다. 자신의 앞날에 마주할 죽음이 가지고 오는 불확실함과 두려움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다만 지혜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 사람의 힘으로 알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알기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無知의 知’라고 표현하고, 자신이 무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반면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일들에 시간을 지나치게 할애한다. 그러다보면 시간을 낭비해서 충분히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마저 놓치는 경우가 많다.
현명한 사람은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고 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많이 알더라도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끊임없이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우를 범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비관적인 태도로 귀결한다.
만일 매사를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나만의 잣대로 끊임없이 부정적으로 판단하려고 시도한다. 그렇다보면 평범한 것도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 만물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 나와 뜻이 같은 사람의 판단 만을 듣는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반대로 나와 뜻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들어보면 마음은 상하지만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세상은 정답보다는 해답을 찾는 과정의 삶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추구하는 삶이 진짜 삶을 사는 것이다.